존재와 시간의 서사
글. 이필 (미술사/미술비평)
존재와 시간의 서사
구본창의 사진은 인간의 감각으로 감지하기 어려운 시간의 축적을 담은 존재에 대한 서사이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이나 생명의 몸체에는 각자 겪은 시간이 쌓여간다. 시간은 존재의 몸과 내면에 표 안 나게 스며든다. 서서히 쌓인 시간은 존재 자체가 된다. 그의 <인테리어>(1998-2015)는 사물이 빠져나간 텅 빈 차고와 상자를 재현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 담백해 보이는 백색조의 사진에서 공간은 알 수 없는 기운과 미세한 존재들로 꽉 차 있는 듯 느껴진다. 사물도 인간도 떠난 공간 구석에 내려앉은 먼지, 벽과 바닥의 얼룩들이 그 안에 쌓여있는 시간을 증명한다. 구본창의 이 작업은 흐르는 시간을 응축하여 재현하는 사진의 매체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본창의 <백자>(2004-현재) 역시 시간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속도로 지속해서 흘러가고 있음을 응축된 시간을 통해 일깨운다. 백색조의 빈 공간과 빈 그릇 사진으로 채워진 전시장에서 응축된 시간은 작은 초침 소리처럼 풀어지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사진이 시간을 정지하여 대상을 박제한다고 하지만, 구본창의 사진은 그 박제의 과정에서 복수의 시간을 겹치고 그 시간 속에 관람자가 엉켜 들어가게 한다. 그의 사진에는 피사체의 시간과 사진가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한 장의 사진으로 이 두 존재가 겪는 각기 다른 시간의 이중주를 드러내는 것은 구본창 사진이 갖는 특징이다. 그의 어떤 사진에서도 피사체는 사진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의 존재와 사진가의 존재가 공존하는 그 시간, 사진가가 카메라를 들고 행하는 밀고 당기기가 자아낸 묘한 긴장의 기류가 구본창의 사진에서 풍긴다. 그리고 거기에 개입하는 감상자의 시간이 얹힌다. 이 대상과 사진가, 감상자의 시간의 삼중주는 (2010-2019)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사진은 한 노모가 간직하고 있는 사망한 아들, 병사의 유품을 촬영한 것이다. 철모를 뚫고 들어온 총알 자국, 뿌연 안경알, 해진 벨트와 신발, 줄이 끊어진 시계, 군인 인식표, 그의 몸에 차고 다녔을 수류탄, 모든 것이 시간과 함께 낡고 녹슬어 있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세부도 놓치지 않은 구본창의 사진은 사지로 내몰린 병사의 처절한 시간과 그 유품을 간직해 온 어머니의 고통의 시간을 재현한다. 그런데 그는 그 유품이 일으키는 감정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듯 한 점씩 회색 배경과 회색 액자 속 정중앙에 배치했다. 그의 사진 작업은 너덜너덜한 신발마저도 범접하지 못할 정갈한 오브제로 장식장에 담아 넣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는 병사의 시간과 손때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극명한 리얼리즘을 구사하고, 동시에 그의 유품을 증거품이 아닌 제의의 사물로 만들려는 듯 죽음의 순간을 방부 처리함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킨다. 마치 무중력의 상태에 있는 듯 정갈하고 아름답게 구성된 이 절박한 시간의 증표들 앞에서 감상자는 비극의 감정과 아름다움의 감정 사이를 먹먹히 부유한다.
사진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
사진은 복제가 가능한 매체이며, 벤야민에 의하면 다수로 복제 가능할 때 예술의 아우라는 빠져나간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구본창의 오브제 사진이 다수로 복제되어 유포된들, 복제된 개개의 사진이 주는 감상이 약화할까. 예술작품이 갖는 아우라는 전통 속에 계승되어온 예술개념과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이 아우라는 하나가 여럿으로 복제되는 물리적 상황에서 붕괴한다. 벤야민은 이를 ‘거리’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우라는 단 하나로 존재하는 유일한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거리’이다. 사진이 복제 가능하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손에 들어와 그 물질적인 거리를 없애는 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제 매체로 제작된 구본창의 사진은 감상자와의 거리를 좀체 좁히지 않는다. 그의 백자 사진이 열 개로 복제되었다 치면 그 열 개는 하나같이 각자의 공간에서 거리를 유지한 채, 고유의 아우라를 방사할 것이다. 이를 사진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제3의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예술가의 존재이다. 구본창의 사진과 감상자의 거리가 좀체 좁혀지지 않으며 아우라를 풍기는 근본 원인은 사진가와 대상 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구본창식의 대상화에 있다. 그의 사진은 대상에 빠져들고 그 존재를 드러내는 만큼이나 대상과의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를 생성하는 것은 구본창만의 정교한 미감이다. 이 미학은 사물 사진이 사물로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구본창의 예술가적 태도에서 나온다.
사진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의 이중주야말로 구본창 예술의 특징이다. 극명한 정치예술을 논한 랑시에르가 예시로 든 작품은 하나같이 사유를 촉발하는 것들이다. 그는 정치적 사유는 결국 미학적인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떠한 사유도 미학적 체제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에 사유의 공간이 존재하는 예술작품은 랑시에르 예술론의 전제이다. 구본창은 <아! 대한민국>(1992-1993) 등 여러 시리즈에서 한국 사회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해왔지만 단 한 번도 극명한 정치적 표현을 선택하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은 구본창의 포토몽타주와 콜라주 실험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포토몽타주는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이 정치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의 포토몽타주 역시 명확한 반전 정치 메시지를 담았다. 랑시에르는 이질적인 것을 조합하는 포토몽타주를 정치적 사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형식으로 보았다. 이것을 발견할 수 있는 해석적 틀인 미학적 체제, 특히 제작자와 감상자 사이의 경험이 단절되는 가운데 그 사유는 공간의 문을 열고 감상자에게 다가간다. 구본창의 <아! 대한민국>은 한국 사회와 전통을 대표하는 상징기호들과 스냅사진을 엮은 실험적인 포토몽타주이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은 신문으로 오려 한반도의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당시 정치 상황을 담은 세 장의 스냅사진을 넣어 구성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국기가 중앙에 들어간 이 작업에서도 직설적인 어법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미학적 장치를 구사함으로써 감상자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차단한다. 한반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담은 스냅사진은 흐릿하고 모호한 상태로 암시의 단계에 머물도록 조절되었다. 이러한 구본창의 미학적 장치는 한국 사회에 대해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감상자의 공간을 더 확장한다. 구본창의 작품에 미학적 사유의 공간은 그 형식과 강도에 있어서 변화를 겪어왔다. 그의 작가로서의 여정에서 예술이라는 개념은 일관되게 자리하지만, 예술에 관한 생각과 표현 특징은 시기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는다. 예술을 동경하고 갈망하며 예술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던 초기의 풋풋한 그림들에는 간결한 구성과 감성적인 색채와 선이 돋보인다. 독일 유학 시절에는 다양한 기초조형 수업의 영향 때문인지 그에게 내재한 조형감각이나 색채감각이 사진에 발현되며 시리즈 구성으로 네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85년 귀국과 함께 그는 한국에서 현대미술을 수행하기 위한 사투를 벌인 것으로 보인다. 독일과 한국의 미술 현장이 괴리가 큰 만큼 그는 더욱더 사진으로 현대미술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더 거칠게 도전한다. 포토그램이나 포토몽타주 등 갖가지 사진 기법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몸으로 수행하고, 오리고, 구성하고, 꿰매고, 흘리고, 강렬한 색을 입히고, 오브제를 찾아내고, 평면을 벗어나 바닥에 설치하고, 사진의 범위를 넘어선 다양한 매체 실험을 감행한다. 이 시기 그는 철저하게 예술가의 태도로 사진에 접근했음을 볼 수 있다.
오브제의 재탄생
실험정신을 가지고 몸으로 예술을 수행하는 격동의 시기를 거쳐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숨>(1995)을 기점으로 그는 점차 관조의 미학을 향해간다. 이전에는 대상과 자신의 거리를 두면서도 결국은 한 몸이 되어 부대끼며 예술성에 치중한 미학적 요소를 불어넣는 작업을 했다면, 이 시기 그의 작업에서는 대상과 차분한 거리두기가 눈에 띈다. 이와 함께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시간 개념도 더 넓어지고 깊고 세밀해진다. 구본창은 한 인터뷰에서 사진 작업은 “어려서 경험한 영상을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어릴 적 작은 사물 존재들과 대화한 기억은 오브제를 촬영한 작업에 섬세한 감각과 울림으로 나타난다. 대상에 주목하는 그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태도와 예술가의 태도가 균형을 이루고, 관조적이고 정적인 고요는 철저한 사진 미학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구본창은 인간의 사용을 통해 사라지는 운명을 타고나 쓰임새를 다하고 소멸하기 직전의 비누 조각에 온전히 주목한다.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가 가질법한 대상에 대한 그의 애틋한 마음은 비누를 오롯이 조명하여 무대 위에 올려놓은 <비누>(2004-현재)에서 드러난다. 여기에서 일상의 비누는 대상에 몰입하는 사진가의 예리한 눈길을 통해 그 형태와 색채, 말라 갈라진 결조차도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조각된 오브제로 탈바꿈한다. 이 작업은 인간의 수많은 손길이 스쳐 지나갔을 비누의 시간을 동영상처럼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촉각적인 사진이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 <백자>와 <황금>은 예술가의 아카이브 충동의 발현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백자>는 본연의 자리에 있어야 할 유출된 문화재를 세계 곳곳에서 찾아 기록한다는 점에서 아카이브 작업이다. 그러나 유출된 문화재의 사진기록은 정보로서 공개되어 있고 굳이 예술가가 기록을 목적으로 촬영할 필요는 없다. 이 작업에서 백자는 예술가의 해석적인 아카이브 방식을 통해 재탄생한다. 도공의 절제된 표현을 통해 탄생한 백자가 고향과 타지에서 숨 쉬어온 시간, 자신과의 만남을 기다려온 사진가에게 갈라지고 긁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백자에 얹어지고, 백자는 미학적 오브제로 거듭난다. 구본창이 오랜 기다림을 통해 만난 백자에 예술적 숨결을 입힌 순간, 하나밖에 없던 백자는 특유의 아우라를 가진 여러 점의 백자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경주의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던 금 장신구들은 구본창의 사진을 통해 또 다른 불멸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철저하게 대상화되고 미학화된 그의 오브제 작업에서 관객에서 가장 유혹적으로 말을 거는 것은 바로 <황금>(2016-현재)이다. 구본창의 사물 사진은 대체로 정적이고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가지고 있지만, 이 황금 유물들은 꾸물거리며 발광한다. 1500년 전 당시 이들이 실제 가지고 있던 느낌을 상상하면서 그 매력을 뿜어내고 싶다는 그의 말은 마치 마술사의 말처럼 들린다. 그의 의도에 따라 매혹적으로 표현된 황금 장신구는 우리의 권세와 물욕에 대한 페티시를 자극한다. 그는 강한 콘트라스트와 역동적인 배경, 조명 효과를 더하여 부질없고 덧없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 들어가는 인간 욕망의 종착역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 유혹적인 모습에 빠져드는 감상자는 생전의 부귀와 권력,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바니타스의 교훈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경험한다.
구본창의 작업은 시종일관 예술가의 태도를 유지해온 사진가의 삶을 보여준다.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오로지 한길에만 매진해 온 사람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가 살아온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보여준다. 정교한 이미지 조율자로 알려진 구본창은 예술에서 넉넉한 자유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고 관람자를 사유의 공간으로 인도하며 삶의 본질에 다가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