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창의 <백자>와 <탈> 연작

감추면서 동시에 보여주는 퍼포머티비티 중 일부 발췌

글. 이영준

구본창의 백자사진은 다른 사진가들이 찍은 백자사진과 완전히 다르다. 그들과는 다른 문제영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구본창의 백자사진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참조물은 다른 사진가들의 백자사진이 아니라 화가 박득순이 그린 백자그림이다. 그의 그림은 백자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또 한 편으로 백자의 차분한 존재감을 잘 다루고 있다. 필자가 그의 그림을 가까이서 본 것은 1970년대 초 국전에서였는데 그는 아마 당시 초대작가였을 것이다. 경복궁에서 열린 전시를 우리 초등학생들은 줄 서서 봤는데 그의 백자그림을 본 우리의 반응은 하나 같이 “우와 진짜랑 똑같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그는 백자의 형태나 색을 빌어 존재감을 그렸기 때문이다. 즉 백자가 탁자 위에 앉아 있는 그 존재의 느낌을 그린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묘사에서 그치는 문제는 아니다.그것은 우리가 대상을 알게 되는 경로와 관계 돼 있다. 즉 백자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하는 문제를 새롭게 정의한다는 것이다. 좋은 예술은 무언가 가르쳐 준다. 그런데 가르쳐 주는 방식과 차원이 비범하다. “국민은행이 어디에요?”하고 물으면 저기로 쭉 가셔서 왼쪽으로 돌아가시면 되요 하고 가르쳐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가르쳐 준다. 구본창의 사진은 백자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백자에 대해 가르쳐 준다. 구본창의 사진은 도자의 역사 책을 읽는 것 보다 더 풍부하고 충만하게 백자에 대해 가르쳐 준다. 백자가 중력을 거스르는 듯 사뿐히 앉아 있는 모양새에 대해 가르쳐 준다.

전달을 대신하는 말로 수행성(performativity)이란 말을 써야겠다. 즉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성질 말이다. 누구의 수행인가? 사진에서는 사람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만드는데 관여되는 모든 것들의 수행이 맞아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수행성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사물이나 기호가 원래부터 의미를 가지고 있다가 매체를 만나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의미라는 것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수행성은 쉽게 말하면 연출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연출과 다른 이유는 시나리오와 감독의 의도가 미리 정해져 있는 연출의 개념과 달리, 수행성이란 어떤 것이 수행될 때 비로소 의미가 산출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이 수행되는 과정의 역동성 속에서 산출되거나 지워져 없어지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 된다. 수행성과 연출의 차이는 구본창의 사진을 다른 작가의 것과 구별해주는 차이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미리 세팅해 두었다가 막이 오르면 작동을 시작하게 만드는 연출의 개념과 달리, 수행성이란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사진의 모든 요소들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구본창은 어떤 요소들이 어떻게 수행되도록 하고 있을까? 혹은, 어떤 수행들을 목격하고 있을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 보자. 구본창의 백자사진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기존의 백자사진에 비해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아마도 거리 두기에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그간 백자를 사진으로 보아온 방식들로부터 거리 두기이다. 어떤 식으로 거리가 두어지고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가 눈으로 거리를 지각하는 것은 선원근법적 질서 덕분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선원근법을 통해 사물을 보고 있다. 그 원근법(혹은 원근감) 속에서 사물들은 공간적으로 질서 잡혀 있고 그것은 의미의 질서로 확대되기도 한다. 즉 가까이 있는 것은 커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아보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사물의 위계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크기는 거리에 정확히 비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위계는 철저히 수학적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보는 방법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15세기에 발명한 것이다. 이런 식의 보는 법은 인간을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와 맞물려 서양의 보는 방법이 되었고, 우리의 눈에도 이식되어 지금 우리는 모든 사물을 선원근법적으로 본다. 구본창은 백자사진을 통해 그렇게 묻고 있는 듯 하다. ‘선원근법을 몰랐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백자를 선원근법적 시각체계 속에 놓고 보는 것이 정당한가?’라고 말이다. 사실 그런 백자들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이건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이건 철저하게 서양의 제도이기 때문에 유물들도 서양의 방법에 따라 수집되고 관리되고 전시될 수 밖에 없다. 즉 우리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리의 유물을 볼 때 서양의 박물관 패러다임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구본창은 백자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런 경로를 달리 설정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조선백자를 서양식의 원근감 속에 두기를 거부하고 있다. 백자들은 백자 만큼이나 흰 빛 속에서 희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아니, 희게 감추어져 있다. 몇몇 사진을 빼면 백자들은 대체로 흰 배경에서 찍혔고, 빛은 백자의 부피감을 강조하고 있지 않는 매우 밋밋한 것이어서, 백자는 부피를 가진 그릇이라기 보다는 한지 위에 옅은 먹으로 그린 것처럼 간신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백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백자 감추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게 구본창이 백자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다. 백자들은 마치 무대 위에 올려놓은 듯 대상을 돋보이게 만드는 극적인 광선 속에 당당히 빛나는 것이 아니라, 배경에 살짝 몸을 감춘 듯이 앉아 있다. 그것은 흡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 듯 하다. ‘아리아와 32개의 변주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곡에서 아리아는 30가지의 변용을 겪는데, 그 과정은 매우 차분하다. 그래서 더 집중해서 듣게 만든다. 구본창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백자가 위대하다’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도대체 백자가 어디 있을까, 왜 저렇게 말 없이 앉아 있을까 궁금해 하게 된다. 그러면서 백자를 속으로 품게 된다. 그렇게, 나는 구본창의 사진을 통해 백자를 품게 됐다.

그런 식의 금 긋기는 탈 연작에서도 나타난다. 구본창은 자신의 탈사진의 본질을 책의 서문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오래 전 우리의 옛 얼굴을, 그리고 감정이 묻어 있는 다양한 얼굴을 잃어버렸다. 내가 찾고자 한 모습은 오늘의 춤꾼이 아니고 백년 전, 2백년 전 아득히 오랜 세월을 거치며 잃어버린 우리의 얼굴이다.“ (『Revealed Person (탈)』 한길아트, 2006)잃어버린 얼굴을 찾는다는 것, 그것은 얼굴 뒤의 또 다른 얼굴을 응시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얼굴이 사람의 것이 아닌 마스크라니. 구본창은 스스로 기존의 무형문화재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차별화하고 있다. 무형문화재보유자들을 찍은 사진들은 그 분들의 얼굴을 통해 옛 삶의 모습을 들여다 보자는 취지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보여주는 것은 텔레비전 보고 지하철 타고 다니는 오늘날의 얼굴이다.아무리 신출귀몰한 사진의 재주라 해도 오늘날의 얼굴을 찍어서 옛날 얼굴을 보여주는 방법은 없다. 차라리 옛날 마스크 자체가 옛 얼굴의 진실 아닌가? 마스크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짜 얼굴이 아니다. 마스크는 그 자체로 진실이다. 그것은 가면 뒤의 진짜 시선을 가리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시선을 마스크 자체의 시선으로 대체하여 더 진짜 시선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때로는 마스크의 시선이 더 강력한 경우도 있다. 구본창의 탈면사진이 그 경우다. 그 마스크 뒤의 시선은 평범한 농부, 할아버지, 아저씨일 것이다. 그의 시선은 역사적인 것도 아니고 초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돈 벌 궁리를 하고 필요한 것을 찾아 헤매는 실존적인 시선일 뿐이다. 그러나 마스크의 시선에는 역사가 들어 있다. 통영오광대 탈이니, 봉산탈이니 하는 역사가 붙어 있다.그러므로, 마스크는 실제 얼굴보다 더 강력한 얼굴이 된다. 마스크의 시선에는 생명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의 시선이 아닌데 실제의 시선을 능가하는 강력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결국은 마스크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역할 혹은 기능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릇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릇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움직이며 어떤 역할을 하고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퍼포머티비티(혹은 수행성)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즉 가면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즉 구본창의 사진이 던지는 물음은 인류학자나 민속학자의 물음과 다르다. 후자들은 ’무엇‘에 대해 묻는다. 이 탈이 어느 지역 것이고 누가 썼고 어떤 경우에 썼는가 하는 것 말이다. 구본창의 사진은 묻는다. 가면이 어떻게 속이더냐, 어떻게 웃기더냐 하고. 결국 그 질문은 종이를 모양대로 접어서 풀칠하고 색을 발라 만든 가면이라는 물건이 어떻게 사람노릇 하더냐 하는 질문이다. 그게 마스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즉 마스크가 어떻게 마스크 노릇하더냐 하는 질문이다. 가만히 있는 책상 조차도 책상 노릇을 수행하고 있는 한에서만 책상이라고 할 수 있듯이, 가면도 가면노릇을 하고 있는 한에서만 가면이다. 구본창은 그런 가면 특유의 수행성에 대한 대응수단으로 사진을 택했다. 여기서 맨 앞에서 쓴, 사진은 어떤 것의 전달매체가 아니라는 말이 다시 나오게 된다. 구본창은 자신을 진실의 전달자가 아니라 영화감독으로서 잘 인식하고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구본창의 사진에서는 여러 요소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드러내고 있다. 즉 이중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진가들이 ‘진실을 전달한다’는 착각 아래 한 겹의 수행만 하고 있는 것과 구본창이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수행하고 있지 않으며 카메라 앞에 벌어진 일을 충실히 전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혹은 거짓하는 많은 사진들과 구본창의 사진이 다른 큰 이유다. 구본창은 사진의 여러 수행성의 단계들, 즉 빛을 받아들인다, 상을 맺는다, 적절한 순간을 선택한다, 이미지로 만들어낸다,적절하게 책이나 전시로 배치한다 등을 잘 조절하고 연출할 줄 아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는 마스크의 본질에 대해 착각하지 않는다. 마스크 뒤에 감춰진 어떤 진실을 드러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스크라는 진실, 즉 사물은 결국 꾸며진 것이고, 그 꾸며진 상태 자체가 사물의 본질이라는 사실 자체에 충실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본창의 사진에서는 어떤 본질이 확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잘 감춰져 있다.

<백자>와 <탈>은 구본창의 사진의 진화과정에서 분명히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진의 담론에 파묻혀 그 위치가 희석되거나 상실되면 안 된다. 이제까지 구본창은 그런 위치를 잘 지켜 왔다고 본다. 나는 이 글을 이렇게 끝맺고 싶다.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더 넓고 깊은 수준에서 예술사나 민족적인 에토스”에 대해 묻는 대신, “개인의 역사에 더 깊이 내려가서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퍼올리는 심해잠수사의 역할을 얼마나 더 해낼 것인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