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론, 구본창>
모호함의 지평을 넘어서 (가나아트, 1992년 3.4월호)
글. 이영준
사진의 운명 위에서의 줄타기
사진 이미지가 손으로 그린 회화 이미지와 다른 것은 그것이 찍혀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적어도 사진을 예술적 창작의 수단으로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진의 운명은 썩 달가운 것은 못 된다. 왜냐하면 흔히 창작이라고 하면 우리는 작가의 천재적 상상력과 독특한 기법, 풍부하고 깊은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찍어낸 것을 창작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확실히 뭔가 잘못된 표현이다. 수험생이 ‘찍어서’맞춘 답안에 어떠한 진실성도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 사진을 ‘찍는다’ 할 경우의 ‘찍는다’는 분명히 같은 뜻이다. 사진이 처한 이러한 묘한 운명에 스스로를 내맡긴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이른바 예술사진가라고 불리는 구본창이다. 사진은 찍기에 따라서는 진부하고 평범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우연히 신선하고 예사롭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구본창은 바로 그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줄타기를 해왔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장난삼아 사진을 찍기 시작한 때부터 일삼아 사진을 찍는 지금까지 후자에 속해 왔다. 말하자면 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버텨온 셈이다. 외줄 위에서 잠깐 서있는 것은 우연히 가능하지만, 줄 끝까지 걸어가기 위해서는 일관된 방법이 필요 하듯이, 구본창의 사진도 일관된 분위기와 내용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가 특종사진을 잘 찍어 주목을 받는 보도사진가라거나, 잘 팔리는 제품의 광고사진만 찍어서 비싼 개런티를 받는 상업사진가라면 그가 하는 사진작업의 운명에 관한 이런 논쟁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사진들에 있어서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호의 약속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어서 누구도 거기에 대해 회의를 품거나 새로운 기호의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으며, 따라서 그런 분야의 사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정해진 기호의 틀안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것인가하는 것이지, 어떻게 하면 기존의 틀을 부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진예술가로서의 구본창이 기존의 기호의 틀과 자신이 만들어낸 기호, 혹은 반(反)기호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거은 우리가 사진하면 흔히 생각하게 되는 그림같은 장면-멋진 풍경과 아름다운 모델, 절묘한 셔터찬스와 독특한 앵글의 선택 등으로 특징지워지는-즉 멋진 사진 한 장 잘 만들어내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사진작업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기호의 속박에서 벗어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상태에서 인간이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는가, 또한 본대로 찍는 것과 이미지를 꾸며 만드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일인 것 같다. 또한 사진을 잘 찍는 다는 것에 얽힌 신화를 파괴하는 것도 그의 목적인 듯 싶다. 나아가 머리 속으로 생각한 것과 사진으로 표현된 것 사이의 간극을 얼마나 메꿀 수 있는가하는 점도 그가 주로 탐색하고 잇는 지점이다. 그가 작가로서 독특성과 영향력을 가진다면 바로 그점에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보는’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관심이 있고, 다른 어떤 일보다도 ‘보는’것을 정말로 좋아한다. 영화나 만화같이 본격적으로 보고 즐기고 푹 빠지도록 만들어져 있는 대상뿐 아니라, 모든 대상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항상 새롭고 즐거운 체험이다. 따라서 창밖으로 아무것도 볼수 없는 지하철은 나에게는 지옥이며, 유리창에 흙탕물이 튀겨 밖이 안보이는 버스는 나에게는 버스로서의 의미가 전혀 없다. 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커지다보니 단지 눈에 어떤 대상의 모습이 비친다는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는 곳과 관계된 지각심리적, 문화적감각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진다. 말하자면 나는 칸트가 말한대로 눈에 타고난 색안경을 쓰고서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도 들고,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나의 시선이 정확치 않음을 느낄때면, 내눈을 가리고 있는 색안경의 종류는 무엇이고 그 성격은 무엇인가가 항상 궁금해진다. 그 일차적인 차원은 각자의 기호나 감수성이겠지만, 어떤 때는 우리는 그것을 편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입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나아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마 본다는 것이 흥미로운 것은 대상 자체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 비치는 사물의 모습과, 그것을 가리고 있는 나의 색안경이 끊임없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싸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사람은 말 잘하고 정치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낀 모든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세상을 정말로 잘 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게 안된다면 자기 눈에 어떤 색안경이 씌여져 있는지라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세상을 잘 보기 위해
나는 사진가가 어느 정도는 거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는 세상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 영역에 따라 누구는 패션, 누구는 풍경, 누구는 보도 하는 식으로 제한되어 있고, 카메라 렌즈라는 한정된 공간과 방식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누구나 보고 지나치는 대상 속에서 사진적인 아름다운과 개성을 찾아내서 표현 하는 사진가는 확실히 잘 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작가 구본창은 주로 무엇을 ‘잘’보며, 어떻게 나름대로 보는 것일까. 그의 특기는 우선대상을 낯설게 보이도록 만드는데 있다. 일상적으로 보아오던 맨홀 뚜껑도 그의 카메라에 잡히면 그것은 더 이상 맨홀 뚜껑이 아니다. 길가에 물이 흘러내린 자국 하나라도 그의 카메라에 잡히면 우리의 기억의 저장고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는 신경을 건드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 비교적 스트레이트하고 친숙하게 묘사된 이미지라 할지라도 옛날의 초현실주의자들이 했듯이 전혀 엉뚱한 맥락으로 서로 이어 붙여 져서 영 묘한 모습이 되고 만다. 그는<긴 오후의 미행>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런 모습을 만들어냈는데, 셔터만 누르면 되는 자동카메라의 무차별적이고 선입견이 없는 시각이 그런 작업에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그의 카메라 눈이 훑고 지나간 이 세상은 마치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 같은 꼴이 되고 만다. 그는 그러한 ‘낯설게 하기’의 방법을 통해서 눈과 손의 관계를 단순히 본 것을 옮겨 그리는 기능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뭔가 복잡하게 꼬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본 것을 찍을 뿐 아니라, 때로는 이리저리 조작하여 망쳐 놓기도 하며, 또 요즘은 심지어 재봉틀을 가지고 사진을 이리저리 꿰매기도 한다. 또한 <서울, 오후 흐림 한때 비> 같은 작품에서는 사진 위에다가 화확적인 작용을 가해 회화적인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하기도 한다. 그는 또 앞으로는 비디오나 컴퓨터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한다. 그의 그런 노력이 도대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이 이글의 목적이지만 그 목적이 잘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작가와 이야기해보고, 기껏 곰곰히 생각해서 알아낸 것은 그가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이고, 그 답은 그 자신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진은 ‘낯설게 하기’의 전략에 의해 획득된 우연성, 꿈이나 무의식을 더듬는 듯한 제스쳐들, 혹은 다중적으로 얽힌 이미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그의 과거의 개인적인 기억의 체험과 어울려 더욱 얽힌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수수께끼에 몸과 마음을 담그고 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좀더 고약한 심성을 가졌다면 그는 남들이 그러한 수수께끼 속에서 헤매는 것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수께끼에 속아넘어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것이 수수께끼가 아니라 뭔가 분명한 진술, 혹은 단정적인 욕망이나 기대를 버릴 때에만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한다. 결국 그의 사진이 수수께끼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진을 대하든지 흔히 가지게되는 속물적인 태도를 그가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이미지란 처음 발명되는 순간부터 간접적인 소유의 욕구를 밀접히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속물스러운 행위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속물적인 태도를 바꿔 말하면 사진 이미지는 금방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따라서 쉽게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요청인데, 이는 이미지화된 대상이 자기로부터 낯설은 상태에서 자기와 맞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는 사진이 어떤 객관적인 대상에 관한 이미지로 결정되는 것, 나아가 결정화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항상 피함으로써 일종의 수수께끼를 내는 입장에 서 있었다. 아무렇게나 선택해서 찍은 길거리의 한 모퉁이-가끔은 간판이 등장하기도 하고, 좌판에 벌여 놓은 물건이 등장하기도 하며, 어쨌든 사진찍힌 대상의 일관성을 찾을 수는 없다. 풍경과 인물 사진들을 빽빽이 연속으로 붙여놓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이야기가 해체되어 있는 작품들, 그들이 가져다 주는 것은 끝간데 없이 뻗치는 또 다른 꿈, 혹은 알 수 없는 이야기, 독특한 상상력과 감수성의 얽힘이다. 다라서 그의 사진에 대해서 ‘이것은 어떤 것을 어떻게 찍은 것이다’라는 식의 해설은 그의 사진에 해서 아무 말도 안하는 것과 같다. 단지 이러이러한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말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예술을 감상할 때 가장 피해야할 태도가 작품을 단번에 읽어버려 그 의미를 단정지으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수수께끼같은 형식의 사진들을 통해 그러한 태도를 상당히 체계적이고도 치밀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예술을 감상할 때의 속물스러운 태도에 대한 거부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상당히 일상적인 대상들로 가득 차있으면서도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인상은 아주 낯설은데, 그의 사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깨우침이란 다름 아닌 낯설게 보는 연습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수십년간 살아와,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신하던 자신의 집구석에서 뭔가 엉뚱한 것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낯설음 같은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 잘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이야말로 알량한 지식의 아집에 빠져 더 큰 진리를 보지 못하는 구렁텅이에 빠지는 순간일 것이다. 세상을 잘 보는 사람은 결국은 어떤 단정적인 기호로 대상을 분해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는 것의 배후에 있는, 눈에 띄지 않는 엄청난 것을 얼마나 못보고 있는가에 항상 주의하며 ‘봄’과 ‘앎’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구본창이 사진의 여러 영역 에서도 굳이 온갖 애매함과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는 이른바 순수사진의 길을 택한 것도 그러한 긴장관계에 흥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수수께끼로서의 이미지
구본창이 내는 수수께끼는 인간이 대상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알량한 일인지, 우리가 사진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도 실은 얼마나 속물적인 단정에 묶여 있는가를 깨우쳐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수수께끼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그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사물들, 이미지들을 주의깊게 보면 그의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무엇인지 대강은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천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천과 실이 가지는 부드러움과 반투명성, 어떤 것을 감싸 안고 보일 듯이 가리우고 있는 모습, 실의 얽힘 등이 그가 좋아하는 특성들이다. 섬유업을 하던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실과 천이 가진 독특한 느낌에 푹 빠져 있었다. 섬유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고 독특한 것이 섬유의 이미지로 비쳤던 것 같다. 어떤 사진에서는 천의 질감이나 색깔 등의 이미지가 곧바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의 사진에서 그러한 특성이 본격적인 수수께끼를 만드는 것은 천의 이미지가 은유화할 때이다. 천의 반투명성은 그의 사진에서는 가리움, 숨김,뭔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그래서 그는 천으로 둘둘 싸여 있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물체를 사진찍기 좋아한다 이러한 수수께끼를 더욱 얽히게 만드는 것은 우연성의 법칙이다. 사진이 다른 어떤 시각예술의 매체보다도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연성에 몸을 맡기고 한없는 여행을 떠난다. 바닷가의 어린이와 버스 차창의 손, 햇빛속으로 나서는 고양이, 어항, 담장, 이런 것들이 만들어내는 연상은 우리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단편적인 이미지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며, 그 순간에 우리도 이미지의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본래 모습을 가리우고 흐리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대상에 대한 욕망과 기대라고 할 수 있을텐데, 우연성과 수수께끼로 얽힌 구본창의 사진은 그러한 욕망과 기대의 사슬을 가차없이 끊어버린다. 그것은 마치 선(禪)문답에 어떠한 욕망과 기대도 끼어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호의 바다에서 느끼는 덧없음
바로 그런 이유 대문에, 그의 사진을 보면 기호(記號)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들은 기호에 죽고 사는 인간들이다. 빨간 불이 켜지면 서야하고 파란 불이면 가야한다. 입구라고 써 있으면 들어가야 하고 출구라고 써 있으면 나가야 한다. 불조심이라고 써 있으면 담배를 피워선 안되고 사랑해요 라고 써 있으면 가슴을 두근거려야한다. 기호는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그것은 문명과 반문명, 원시와 현대를 가르는 중대한 잣대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진도 항상 그러한 기호에 묶여있다. 풍경사진은 장엄해야하고 결혼사진은 예뻐야하며 보도사진은 특종이어야 하고 다큐멘터리는 감동적이어야 한다. 그런 기호화된 사진에 익숙해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초라한 풍경사진, 못생긴 결혼사진, 낙종을 한 보도사진, 덤덤한 다큐멘터리가 가져다 주는 진실이란 보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항상 장엄하고 예쁘고 감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항상 통쾌하게 결말은 내지만 삶에 관한 진실은 별로 전해주지 않는 헐리우드식 영화와 시종일관 지루하지만 잔잔한 진실을 전해주는 동구권 영화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후자의 경우는 아예 사진으로 치지도 않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사진을 통해 더욱 숨김없는 이 세상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기호란 단지 하나의 약속에 불과하며 그것은 언젠가는 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생동안 사진관을 하며 멋진 신사아저씨, 색동옷 입은 아가씨, 고추를 드러낸 아기를 잘 박아준‘사진사’가 아무리 애써도 ‘사진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세련된 안목과 기법을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일생동안 사진관에서 익혀온 사진의 기호를 뛰어넘을 과감성도, 그 이후의 지평을 탐색할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사진이란 것이 기호에 단단히 묶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설악산의 운해나 일출을 소재로 하여 그림같은 풍경사진을 찍는 데 만족하는 ‘사진작가’가 자연을 동시대적인 삶과 문화의 한 요소로서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고립된 하나의 대상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자신의 의식과 사진을 묶고 있는 기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구본창은 그러한 기호의 덧없음을 타고 넘어, 그만의 기호를 표현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 섬유와 그것이 가지는 은폐의 이미지이다. 그의 기호는 유기적이거나 통일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우연성, 분열성, 파편성을 이용한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에 만 레이나 마르셀 뒤샹이 엉뚱한 대상들을 한데 결합하여- 변기를 전시한다든가, 다리미 바닥에 압정을 붙여놓고 <선물>이라는 제목을 붙인다든가 하는-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때의 우상파괴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서양의 우상파괴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아닌 작품을 통해 ‘예술’이라는 말에 부여된 권위과 허위,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제도, 나아가 그것을 인정하고 귀여워해주는 세계 전체에 대해 강렬한 항의와 조소를 던졌던 데 반해, 구본창의 사진이 가진 우연성과 의미파괴의 효과는 작가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공간에 머물고 있다. 만 레이나 마르셀 뒤샹의 작품에서는 기존의 일상적 대상들에 얽힌 기호가 충돌하는 파열음이 엄청나다면, 구본창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호들의 파열음은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섬세하게 조절되고, 배치되어 있어서 감각적인 즐거움을 줄 정도이다. 그를 흔히 가장 세련된 감각을 가진 사진예술가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러한 파열음을 그가 적절히 이용할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사진이 세련되다는 점이 아니다.(그는 세련된 감각의 패션사진가로서도 성공하고 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사진을 만드는 데 있어서 일관된 톤이나 구성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남들보다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기는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세련됨이 탑을 멋지게 쌓는 식이 아니라 잘못 쌓아 놓은 탑의 그릇된 체계에서 벗어날 줄 아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시각적 의사소통의 고리를 끊을 줄 안다는 점이 그에게 세련되다느니, 독특하다느니 하는 평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의 사진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은 헤어진 옛 애인을 생각할 때 느끼는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의 틈새, 현존했던것의 기억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다. 그의 사진에서 읽을 수 있는 의미는 나무에 달린 감을 따먹을 때처럼 무언가 확정적인 것을 획득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방금 놓쳐버린 기차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과 관계가 깊다. 그래서 그는 매체가 만들어 내는 고정된 이미지를 피할 분 아니라, 한 매체에 고정하는것도 피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재봉틀을 가지고 사진을 바느질을 한다든가, 90년도에 서미화랑에서 가졌던 개인전에서 발표한 <생가의 바다>에서와 같이 사진 속에 인체의 모양으로 오려붙인 형상을 집어넣는다든가, 아니면 그 외에 헝겊을 씌운다든가 하는 식으로 사진마저도 떠나려는 듯이 보이는 것은 그의 버릇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작업을 보고 ‘사진을 떠난 것이니 사진과는 상관없는 회화나 다른 분야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진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야말로 사진을 잘 모르는 순간일 수 있듯이, 사진을 떠나는 순간이야말로 사진에 다가서는 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