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창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글. 이진숙(미술사)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중략)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 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신경림 시인의 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의 일부이다. 사진 작가 구본창의 30여 년 간의 작품들을 펼쳐보면서 떠올린 시이다. 넓은 세상에 나가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성장한 연후에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을 비로서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자각의 과정을 시는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근원적인 모습의 자각은 결코 고답적이고 보수적인 과거 회귀를 의미하는 아니다. “세상의 전부”가 되는 것은 그렇게 남은 실루엣뿐이고, 그 디테일을 채우는 것은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자의 몫이다. 우리는 과거를 단순하게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자각하는 일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술사에서는 과거가 새로운 진전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서양문화사가 자크 바전은 <새벽에서 황혼까지 : 1500-2000>에서 근대형성기에 과거의 사건을 재해석해서 하나의 사상적 틀을 만드는 식으로 과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태도가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사상적 틀을 구축하는 식으로 과거를 적극적인 활용하는 것은 기성질서의 해체하고 미래를 적극적으로 기획하는데 일조한다. 실제로 현재를 부정하고 더 깊은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근본주의 radicalism적 태도는 20세기 초반 예술 아방가르드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고갱에게는 타히티의 원시 문명이, 피카소에게는 이집트 미술과 아프리카 조각이 문화적 근본주의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누구보다 급진적이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출발점은 바로 서구화의 흐름 속에서 잊혀졌던 러시아 전통문화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대가 튀어나옴”으로써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실제로 ‘러시아 적인 것’에 열광했던 말레비치, 칸딘스키, 샤갈 등의 러시아 아방가르드들은 서구문화권에서는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아방가르드들이 되었다. 구본창과 관련해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들의 태도들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맹렬하게 진행된 세계화의 와중에, 한국미술계는 국제적 담론을 따라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국제적인 감각도 중요한 요소들로 자리잡았지만, 우리 미술 속에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그려 보는 것은 그 동안의 미술계의 근본적인 윤곽을 잡아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 표현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문화사회학적으로는 ‘밈(Me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수전 블랙모어는 최근 저작에서 ‘밈(Meme)’은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이라고 정의하는 데,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유전자로, 재현과 모방을 되풀이하며 전승되는 언어·노래·태도·의식·기술·관습·문화를 통칭한다. 신경림 시인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바로 “밈(Meme)”의 자각 과정을 시로 보여주는 가장 멋진 예가 될 것이며 사진에서는 구본창의 작품이 그렇다. 최근에 발간된 구본창의 책 <공명의 시간을 담다>(컬처그라퍼, 2014)는 그간의 창작에 관한 깊은 고백이자 작품 세계 속에 녹아 들어있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들여다 보는 데 도움이 되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 글의 목표는 구본창의 작품세계에 내제되어 있던 한국적인 ‘밈(Meme)’의 작동을 구체화시켜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국 사진의 1세대작가로서 “사진 매체의 실험적 가능성을 개척해온” 구본창의 작품 세계의 근저에 작동하고 있는 한국적인 ‘밈(Meme)’을 만나게 될 것이다. 구본창 역시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처럼 과거를 현대적으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진척을 이루어냈다. 여기서 그가 탈, 백자, 곱돌 등 전통적인 소재를 찍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매우 편협한 일이며, 자칫하면 오히려 왜곡된 생각을 만들 뿐이다. 한국적인 ‘밈(Meme)’은 소재 선택의 차원을 넘어 보다 심원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사물을 해석하고 화면을 구성하는 구본창의 시선에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발견한다. 그가 한국적인 것을 전혀 의도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지만, 매우 깊게 한국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나는 구본창의 작품을 ‘사진의 역사’에 국한시켜서 보지 않을 것이다. 20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거쳐서 살아온 동시대인으로써 그의 예술작품과 비교될 수 있는 다양한 매체의 이미지들을 동시적으로 바라보면서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주파수 낮은 사물들과의 공명

어떤 카메라는 화려하고 장엄한 순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반면 구본창의 카메라는 그렇지 않다. 그의 카메라는 피사체로부터 너무 멀지 않은 그곳에 있으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미소한 순간을 주목한다. <공명의 시간을 담다>에서 그는 “사진을 통해 사회적으로 큰 주제를 다루기보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과 삶의 통찰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라져 가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잡아내어 기록하며 그 매 순간의 공명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구본창 자신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의 순간’과 ‘공명’은 구본창의 사진이 탄생하는 순간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들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에는 사물이 주인공이다.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성적인 의미에서의 사물은 사라졌다. 사물은 상품이 되었다. 상품은 인간 욕망의 집약체이자 기획자가 되었으며, 사회적 관계 전체가 상품화되었다. 칸트의 ‘예술적 무목적성’은 상품과 반대되는 성격을 예술품에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근거로 자본주의의 상품 사회를 초월한 예술적 자율성 이론이 정립되었지만, 상품은 유령처럼 현대미술의 근처를 떠나지 않고 서성였다. 1960년대 팝아트와 미니멀아트는 ‘상품 미학’에 매료되었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개념미술과 대지미술이 함께 발전하였지만, 상품과 미술의 상품화 경향으로부터 어떤 예술가들도 자유롭기 쉽지 않았다. 

사진작가 안드레이 구르스키는 자본주의 풍경의 장엄함을 찍어냈다. 상품들이 끝없이 쌓여있는 99센트샵 혹은 소수의 명품 의상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고급스러운 프라다 샵의 진열장 – 그 어떤 것이든 구르스키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끝을 모르고, 확장되고 있는 장대한 자본주의적 풍경이었다.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개인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무한성 앞에서 느끼는 숭고미를 광대한 자연 풍경에서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 무한성은 끝없이 펼쳐진 상품의 바다, 무분별한 소비로 인한 형성된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에서 발견된다. 이게 자본주의적 숭고의 핵심이다.

반면에 구본창이 사랑하는 것들은 “닳아 없어지거나 시간 속에서 점차 잊히고 사라져 가는 것들” 들이다. 상품적 가치는 이미 오래 전에 소멸된, 인간의 손 때는 묻었으나 역사가 되기에는 함량이 좀 부족한 그렇고 그런 물건들이다. 예컨대, 거의 다 쓴 조그만 비누조각들. 구본창은 이 자본주의적 가치가 없는 물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구본창은 어려서부터 소소한 것을 모으기 좋아했고, 2012년 국제갤러리에서는 이 물건들을 선 보이는 전시를 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독일 유학시절 가장 인상 깊은 수업을 정물화를 배우던 시간이라고 회상하면서 “가장 본질적인 존재감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 방식을 통해 정물이든 인물이든 풍경이든 그것이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내면, 나는 그 이야기들을 그림이나 필름에 담았다.”고 말한다. 전시장 벽에 걸려있는 비누 조각들의 사진은 매우 달콤한 파스텔톤의 색, 부정형의 겸손한 생김새, 사라져가는 것들이 내쉬는 낮은 숨소리를 들려준다. 구본창의 사진을 통해서 욕망을 추동하고 기획하는 상품이 아닌, 미약한 존재들이 전하는 낮은 주파수의 소리를 듣고 우리는 더불어 이에 공명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구본창의 소소한 사물들은 인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존재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사랑의 기원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탈>시리즈이다. 그가 찍은 것은 탈춤의 연행 장면이 아니다. 탈을 써서 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보통의 인물사진을 찍듯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물들의 포즈는 그들이 탈과 하나가 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구본창이 탈에서 바라본 것은 “한국민속의 전통에 잠재된 깊은 슬픔”이다. 의도적으로 주변부를 흐리게 해서 몸의 비중을 줄이기는 했지만, 탈은 사람의 몸을 얻은 후에 온전히 제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 그의 카메라는 사물 속에 담겨있는, 미처 발화되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있다.

그에게서 발견되는 <어머니의 할머니의 실루엣>의 절정은 백자 작업이다. 백자의 아름다움은 끊임없이 상찬되어 왔으며, 한국미의 지극한 구현으로 여겨져 왔다. 한국 현대미술에서도 김환기, 고영훈 등 백자, 특히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작가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백자가 회화가 된다는 것과 사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였다. 구본창은 사진의 “사실적이고 기계적인 특성과 백자가 빚어내는 자연스러움은 좀처럼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아 고민을 했고, 결국 “백자의 외형적인 형태보다 그것의 내면에 흐르는 깊고도 단아한 감성을 파고들자”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화면에 담긴 것은 백자의 숨결이었다.

부드러운 피치핑크 톤으로 조절된 백자는 여성적인 곡선을 우아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촉각적인 감각을 전한다. 백자의 무심한 형식적 미완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일부러 살짝 흐려진 초점의 사진을 찍었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차가운 도자기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의 우리는 박물관 안에 고이 보관된 백자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지만, “글을 쓰다가 막히면 옆에 놓아둔 크고 잘생긴 백자항아리 궁둥이를 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라는 김환기의 말이나, 소탈한 복장으로 자기를 쓰다듬고 있는 간송 전형필의 사진을 보건데, 백자를 포함한 자기의 감상법은 기본적으로 촉각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것은 생활의 기물들로 늘 사람들의 손길이 닿는 것들이 아니었겠는가? 구본창의 사진은 보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각-촉각적인 공감각을 담아냈다. 백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앞서 구본창에게 있어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결코 소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물을 해석하고 화면을 구성하는 시선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했다. 초기 백자 시리즈들은 <OSK 10 BW PL Original Vessel from The Museum of Orientsl Ceramics, Oska 2005>처럼 무채색의 것으로 여러 백자들이 마치 이탈리아 화가 모란디(G. Morandi)의 정물화들을 연상시키듯이 배열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모란디의 정물화들은 개성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서 정물에 회칠을 하고 기물들을 이렇게 저렇게 배치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비슷비슷한 그림들을 수 없이 그리면서 모란디가 추구한 것은 새로운 조화와 질서였다. 모란디의 작품은 이차대전 이후 서구사회의 내적인 붕괴와 새로운 질서의 갈망을 보여준다.  

모란디의 정물화에서는 이전 시대 정물화의 전통적인 구성법과는 사뭇 다르게 사물들이 매우 평면적으로, 다소간 강박적으로 나열이 되어있다. 구본창의 백자들은 모란디의 정물화처럼 다소간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란디 같은 강박성은 없다. 전후의 정신적인 붕괴를 반영하듯이 모란디의 정물들은 강박적으로 모여있을 뿐이며 개체로서 독립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구본창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느슨한 나열에서 백자는 언제든지 개별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앞 서 지적한 것처럼 그가 백자 자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에 감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그에게 기억되어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찾아보자.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따라가 보면 흥미로운 회상의 한 대목을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제사를 준비하던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를 부르더니 밥솥 뚜껑을 열어 하얀 쌀밥 위에 새겨진 촘촘한 발자국들을 보여주었다. 마치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똑바로 걸어간 듯한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설명하기를, 오늘은 할아버지의 기일이고 새 발자국이 보이는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새로 변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내 안에서 영혼과 생명체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사랑이 싹튼 것은 그때였던 것 같다.” 다소간 미신적으로 들리는 이런 류의 비슷한 이야기들을 어린 시절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두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구본창이 그 작은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단순한 인간사 외부의 외재적인 무표정한 것들이 아니라 교감할 수 있는 대상임을 체험한 이야기다. 이러한 사물과 세상과의 교감은 예술가들이 가진 놀라운 재능의 핵심이다. 이미 벌어져서 표면으로 드러난 일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쉽게 가시적인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물들이 보내는 낮은 주파수의 미소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감응력이 놀랍게 발달한 사람들은 예술가가 된다. 

1601년 햄릿이 “To be or Not to be”라는 독백을 내뱉는 순간, 서구적 자아는 세계의 순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고독한 사색자가 되었다. 세계는 분석과 개발의 대상이 되었고, 서구적 자아는 세계와의 통합성을 잃었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예술의 오랜 과제였다. 반면 동양에서는 물질과 관념을 하나의 일체로 간주하는 통합적인 사고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사물과 자연과의 섬세한 감응력을 발전시켜온 우리의 미감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사물을 외재적인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하고 자기화시켜서 감응하는 방식은 한국적 샤머니즘적 세계인식의 방법이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미신으로 간주되어서 이 전통이 많은 부분 파괴되기도 하였지만, 잘 알려진 대로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한국 문화의 본류로 샤머니즘적인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미감을 지적해왔다.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도 샤먼으로 자처하면서 샤먼-예술가 유형을 만들어내었다. 백남준은 “첨단 기술에 동양적인 선 사상과 샤머니즘을 결부”시켰다. 이로써 백남준은 세상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 사의의 관계와 소통을 자기목적으로 하는 예술가 유형을 만들어냈다. 그가 사용하는 매체가 무엇이든 샤먼-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와의 교감이었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는 것들 그리고 생명을 들고 나는 숨. 그런 찰나의 대상물을 촬영할 때 내가 느끼는 교감은 일정량의 에너지로 필름에 스며든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어떤 사진을 보고 감동을 느꼈다면, 안에 담긴 대상에서 비롯해 필름 속으로 숨어든 에너지가 인화지에 혹은 책에도 조금씩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구본창의 말은 그의 작품세계의 핵심에는 바로 이런 감응력, 세계와의 교감이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낮은 주파수로 전송되는 존재의 숨결을 포착해내는 탁월한 감응력과 감수성으로 구본창은 상품적 가치도 없고, 역사적 의미도 크게 없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물을 가장 단순하지 않은 인간적인 사물로 전환시킨다.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바라보기

서양미술사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가시적 세계의 재현이 최고의 과제가 되었다. 그 결과는 사진과 인상주의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푸코, 들뢰즈 등 여러 학자들의 ‘재현’의 신화, ‘객관성의 신화’를 깨기 위한 지난한 노력들이 이어져왔다. 그것이 회화, 사진, 미디어 아트 등 어떤 매체이든 상관없이 시각 예술(Visual Art)은 가시적인visible 세계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invisible 것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프랑스의 매개론자 레지스 드브레는 자신의 저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가시적인 이미지의 탄생 자체가 비가시적인 것(죽음)과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부장품으로 무덤가에서 태어났다. 

<공명의 시간을 담다>에서 구본창은 1995년 부친의 죽음을 매우 애닯게 기억한다. 가냘픈 숨을 내쉬는 벌어진 입과 뼈만 남는 굴곡진 손을 찍은 사진은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던 아버지, 한때는 강건했던 한 사람의 죽음을 기록한 사진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타인의 죽음뿐이다.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떠올릴 수 있다. 레지스 드브레의 말처럼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나’의 죽음에 대한 사고 속에서 우리의 사고는 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덧없이 스쳐가는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신적인 것으로” 고양된다. 인류는 존재를 소멸로 이끌고 가는 “죽음에 대해 이미지의 불멸성”으로 맞서왔다고 레지스 드브레는 주장한다. 즉, 이미지는 죽음에 대처하는 일종의 타나톨로기란 말이다.

낮은 주파수로 발신하는 사물들의 미세한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구본창의 감응력은 그만의 타나톨로기를 만들어냈다. “죽음에 대해 이미지의 불멸성”으로 맞서는 작업이 본격화된다. 개체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슬픈 것이지만, 종의 생명은 그렇지 않다. 늙은 개체의 죽음은 새로운 개체에게 길을 내주며 종의 영원에 가까운 보존을 가능하게 하는 지혜로운 과정이다. 오래 전부터 사계절의 변화, 자연의 순환을 지켜보는 것은 가장 이해하기 쉬운 타나톨로기의 교과서였다.

변하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죽음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죽음으로 귀결되지만 그것은 완벽한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한때 그들이 존재했던 흔적을 남긴다. 시간과의 대결 속에서 결국 지워질지라도 말이다. “생명의 순환과 재생의 과정”이 가지고 있는 “소리 없는 치열함과 아름다움”을 담아낸 <오션>, <리버런>, <스노우>, <화이트>, <시간의 그림> 연작들은 구본창의 감성 충만한 타나톨로기이다. 여기 포착된 대상들도 앞서 언급한 그가 사랑하는 “닳아 없어지거나 시간 속에서 점차 잊히고 사라져 가는 것들”의 목록에 당연히 포함된다.  

이 작품들에서는 삶의 생생한 가시성 대신 죽음의 추상성이 그의 화면에 자리 잡는다. 일본 교토에 있는 헤이안 시대의 절의 빈 회벽면을 찍은 <시간의 그림> 시리즈에서 구본창은 생생하게 융성하고 있는 존재보다 스러진 흔적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빈 벽면에서 그는 많은 존재의 흔적들을 보았다. <화이트>에서 여름에 무성했던 담쟁이들은 그 줄기마저 거두어져 사라지고 점점이 남은 흔적을 담았다.

생명의 순환이라는 관념은 봄에 가을의 풍경을 읽어내는 것이고, 겨울에 봄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부재의 빈 벽이 아니라 흔적으로 남은 존재를 향한다. 별처럼 흩어져있는 점들은 한 시절이 지나갔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시 돌아오리라는 약속의 흔적이기도 하다. <스노우> 연작에서 시간이 흘러 눈은 기어코 녹고 새싹이 돋아나듯이 검은 자갈돌들이 흰눈 속에 점점이 검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것은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선이다.

여기서 구본창의 카메라는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제유법 synecdoche 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화이트>나 <시간의 그림>은 전체 벽을 찍은 것이 아니고, <오션>과 <리버런>은 먼 바다, 먼 물을 찍은 것이 아니다. 일본 작가 히로시 스기모토는 수평선을 멀리 바라보며 찍었다. 히로시 스기모토의 사진은 생명의 보편적인 기원을 담아내는 의지가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에게해이건, 동해이건 물과 하늘이라는 세상의 대비적 구성의 요소를 보여주는 동일한 포맷으로 촬영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거꾸로 구체적인 지명을 일일이 제목으로 언급했다.

반면 구본창의 바다 혹은 물은 바로 눈 앞에서 일렁거린다. 그가 주시하는 것은 지금 이곳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며, 무한한 움직임이었다. 구본창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전체 강이나 바다의 매우 적은 면적이며 촬영된 장소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 다만 그곳이 어디이든 그 일렁임과 움직임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그 어디를 가도 그렇게 물결은 흔들리고 있을 것이라는 제유법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한국 전통건축의 철학적 미학적 측면을 세밀히 연구해온 건축학자 김봉렬은 종묘의 아름다움을 분석하면서 “부분과 전체 모두를 지배하는 단순성. 인위적인 장식과 기교와 조작을 배제함으로써 얻어지는 초월적 효과들. 버려서 얻어지는 것들, 없음이 있음으로 역전되는 높은 차원의 생각들. 순환적 동선구조”를 그 특징으로 지적한다. 부분에서 전체를 유추해내는 제유법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동질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작은 단위들의 무한한 반복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부분에서 전체로, 순간에서 영원으로 넘어가는 지룃대가 된다.

이것은 한국미술계의 한 획을 이루는 모노크룸의 추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조형원리이다. 김봉렬은 또 한국 건축물의 모든 차원의 구성 요소에는 반복되는 구성의 원리로  “비워진 것과 채워진 것(허와 실)의 조합”을 지적한다. 개방된 마루와 방, 마당과 집채는 이런 허와 실의 조합의 가장 작은 단위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각자 어떻게 연결되며 얼만큼의 양으로 연결되는가에 따라 단칸집도 될 수 있고 99칸의 대궐집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와 부재에 대한 동시적 인식 역시 이런 구조의 주거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자들에게 유전되는 사회적인 ‘밈Meme’, 구본창이 바라보았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다.

<화이트>처럼 허와 실, 존재와 부재가 하나의 세트라는 인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작품들이 바로 <인테리어>와 <오브제> 시리즈이다. <인테리어>는 정말 내부, 순수하게 비워진 내부의 빈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을 우리는 정말 텅 빈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빈 공간에서 기어코 존재의 어떤 흔적들을 찾아내고야 만다. 여기서도 구본창의 제유법적인 언어는 계속 구사되어 차고와 빈 상자의 실제적인 크기에 대한 감각은 사라진다. 크던 작던 그곳에는 무언가가 있었고, 이제는 사라졌다. 제목은 분명 <오브제>라는 대상성 자체를 지칭하고 있는데, 작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있었던 흔적만을 보게 될 뿐이다. 빈 공간에 대한 탐닉은 그렇게 이어진다. 가시적 존재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부재 속에서도 존재를 느끼는 미학의 구사이다. 

  

비서구적 시각의 프레임

전통적인 서구문화에서 조화란 기본적으로 기하학적인 질서에 입각한 것이었다. 세계의 본질을 수라고 규정했던 피타고라스는 결국 자연에 존재하는 황금비례의 수적인 질서를 찾아냈다. 이 관념은 중세에도 이어져 신성기하학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거장들도, 푸생도 이 질서를 잊지 않았다. 환멸적인 현실이 디스토피아의 무질서한 공간이라면, 유토피아는 질서와 조화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이 관념은 사진 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의 관념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성서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적혀있지만 나에게는 태초에는 기하학이 있었다.”고 말한 카르티에 브레송이 사진의 ‘결정적 순간’에 드러낸 것은 기하학적인 질서에 입각한 세계의 본질이었다. 기하학적인 질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화면을 과감하게 트리밍했다. 앞서 모란디의 예에서 보았듯이 2차 대전 이후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질서한 현실의 현상을 거두어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기하학적인 질서를 드러내는 것, 특히 원근법을 통해서 구성적 질서를 드러내는 것은 서양인들의 머리 속에 피타고라스 때부터 내재되어 왔던 그들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다.

그러나 구본창이 바라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달랐다. <오션>, <리버런>, <스노우>, <화이트>, <시간의 그림> 시리즈들은 그것은 시작도 끝도 질서도 없는 평면적 연속이다. 부분을 찍어서 무한을 제유하는 연속의 개념은 서구적인 프레임을 넘어선다. 눈이 녹기 시작한 자갈밭을 찍은 <스노우> 연작에서도 실제 찍힌 면적의 크기는 매우 적다. 적은 부분을 가지고 큰 전체를 암시하는 제유법적인 어법 때문에 우리는 가끔 구본창의 화면을 보면서 혼돈을 일으킨다. 의도적으로 야기된 크기의 혼란은 연속의 개념을 절대시하게 된다. 평면은 무한히 연속될 수 있다. 실제 크기에 혼돈을 일으키는 화면은 일부를 찍어서 반복, 연속, 무한을 암시하는 구본창 고유의 어법이다.

“나는 생명 없는 질서보다 생명 있는 무질서가 좋다”는 장자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구본창의 풍경시리즈들은 시작도 끝도 질서도 없어 보이는 평면의 연속처럼 보인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끝나는 지 알 수 없는 올 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평면은 연속된다. 바다를 찍은 것이건, 담쟁이를 찍은 것이건, 사찰의 벽을 찍은 것이건, 떡을 찍은 것이건, 눈 덮인 자갈밭이건 구본창의 세계에서 그것들은 무한 연속을 암시한다. 작은 것이 큰 것일 수 있다면, 그 반대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여유 있는 농담이 발생한다. 두 개의 납작한 작은 떡을 찍은 장면은 실제 인화된 크기를 보면서 혼돈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균질적인 무늬 같은 추상은 바로 달콤한 떡의 얼굴이다. 이런 작품을 보면 도대체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그렇게 적대적으로 세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금강산 02>는 매우 구본창다운 이상한 ‘금강산 이미지’이다. 나는 이 ‘이상한’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 정선의 금강산 그림부터 일반적인 관광객들이 찍어오는 다양한 금강산 이미지들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정선의 금강산전도나 변관식의 금강산도는 깍아지른 듯이 서 있는 준봉들의 위엄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수 많은 봉우리들의 어우러짐을 포착할 수 있는 원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반면, 이 작품에서도 구본창은 예의 제유법적이고 평면적인 화면을 선호한다.

렌즈를 땅겨 찍어서 바위산의 부분을 찍은 이 사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금강산 준봉들의 장엄한 몸체가 아니라 그 바위틈에 용하게 자라나고 있는 소나무들의 경이로운 생명력들이다. 담쟁이, 물결을 바라보던 애잔한 시선이 금강산의 장엄함을 만나서 강한 생명력을 부드러운 톤으로 칭송하는 노래가 되었다. 여기서는 어떤 입체적인 구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평면성은 생명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다. 요즘은 사진과 회화가 모두 입체예술과 미디어 아트와 대별되는 개념으로 ‘평면예술’이라 불리지만, 원래 이 평면성의 개념은 사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회화의 특질로 논의 되었다. 

서양미술사에서 한동안 심도 있게 논의 되었던 회화의 평면성는 원근법에 입각한 재현의 허상을 깨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원근법적인 중심의 파괴와 추상화와 올 오버 페인팅의 등장 등 한동안 이어진 회화의 평면성 논란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고의 전환을 위한 한 바탕의 소동이었을 뿐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회화가 평면이라는 것은 논할 필요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가로로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두루마리 형식의 그림은 세계의 무한성과 부드럽게 조응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황금비율에 맞추어져 짜여진 캔버스는 명백하게 중심과 부심을 설정하고, 그 안에 원근법과 단축법, 명암법 등으로 현실을 압축해서 표현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무한한 현실을 보여주는 세계의 창은 현실을 제 마음대로 단절시켰다. 세상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았던 사진도 의심하지 않고 캔버스의 비율 그대로를 따랐다. 왜냐하면 카메라야 말로 일점소실점에 가장 충실한 시각이기 때문이다. 시각의 형식과 그 형식이 강요하는 내용은 뜻밖에 완고하게 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구본창은 흥미로운 시도를 한다.

구본창의 중요한 작품이 바로 <태초에> 시리즈는 한국의 전통적인 조각보의 형식이 차용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젊은 남자 무용수를 모델로 찍은 것이지만, 이 역시 일반적인 인물사진과도 거리가 멀다. <태초에> 시리즈에 등장하는 몸은 익명의 몸이다. 그가 사랑하는 사물들이 소유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기념품들이 아니 듯이 이 몸은 특정인의 삶을 기억하는 몸이 아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쇠락을 잊은 관능적인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 몸을 대칭적인 기하학적인 프레임안에서 포착했다. 그러나 구본창에게 중요한 것은 모델들은 절망적이고 지친 ‘몸짓’이었다.

구본창의 “운명에 휘둘리는 생명체의 고난에 연민”의 시선은 익명의 몸이 보여주는 절망적인 몸짓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조각보처럼 연결된 인화지에 프린트된 이 작품들은 고의적으로 깔끔한 마무리를 거부하였다. 물론 가능한 일반적인 캔버스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작은 조각들로 불규칙하게 마무리된 테두리는 확장의 가능성을 충분히 암시한다. 특히 두 손과 두 발만을 보여주는 <태초에 10-2>는 네 개의 화면이 연결된 듯한 비율로 만들어졌는데, 위 아래로의 확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구본창의 작품에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 보다 적극적으로 응용될 때, 이런 포맷의 변화가 더 극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비누 작품의 설치 장면이 조각보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했다. 비누 사진들은 개별작품에서도 다만 그런 허약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애닯고 처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여러 작품들이 한 벽에 나란히 전시되었을 때는 미소한 것들의 어울림 속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버려지는 자투리천들의 협동으로 태어난 조각보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한다. 조각보의 구조는 중심을 주장하는 무엇, 그래서 결국은 다른 것들을 주변부로 만드는 힘과 권력을 가진 무엇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조그만 천들은 얼마든지 이웃을 바꾸며, 어떤 이웃들과도 친화하며 존재하는 평온한 세상을 만드는 힘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는 가장 약한 것들이 가진 힘들을 읽어낸다. 자투리천으로 이루어진 조각보의 크기는 무한하다. 그것은 정사각형에서 직사각형으로 변형될 수 있으며, 무한히 증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덧붙인다고 해서 그것은 주변부가 되지 않고, 단지 연장될 뿐이다.

백자와 민화풍의 꽃을 결부시킨 작품은 일반적인 병풍의 한 폭과 같은 비례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은연중에 강요하던 시각적 프레임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프레임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의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과거로부터 현대가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그의 최근 작품들은 우리 전통의 시점을 자유롭게 차용한다. 중국의 황산을 찍은 사진 역시 그러한데, 일반적인 풍경 사진이 공간의 심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그의 황산 사진은 일반적인 삼원법을 사용한 동양의 전통회화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인화지의 형태 역시 세로로 길쭉한 족자 형식에 근접해 있다. 카메라 렌즈는 일점 포커스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사실 어떤 유화보다도 원근법적일 수 있다. 그런데 구본창의 카메라는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바라보는 자, 세상을 재해석하는 자, 즉 예술가 자신의 의지에 굴복하여 하나가 되고 있다. 그의 카메라는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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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자크 바전, <새벽에서 황혼까지 : 1500-2000>, 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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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러시아 미술사 :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 민음in, 2007

Lee Jinsuk, The Story of Russian Art, Minumsa,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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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글항아리, 2011

Regis Debray,  Vie et mort de l'image, 1992

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컬처그라퍼, 2014

조정환 등, 플럭서스 예술 혁명, 갈무리, 2011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 건축 이야기 1,2,3, 돌베개, 2006

최준식, 한국인들은 왜 틀을 거부하는가?, 소나무, 2002